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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영국 관계 역사 (feat 캐나다에 왕이 있다고?)

by 하하호호 2023.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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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역사의 시작

15세기 이탈리아 항해사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는 뚱딴지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1492년 8월 3일 스페인 여왕 이사벨라가 제공한 3척의 배와 120명 선원과 함께 70일 만에 카리브해 섬에 도착합니다. 이곳은 북미 대륙이었지만 콜롬버스는 인도의 서쪽이라고 믿었고, 현지 주민들을 인디언이라 부르게 됩니다. 이곳이 인도가 아니라는 사실은 1513년 아메리고 베스푸치에 의해 알려지면서 북미대륙은 아메리카라고 불리게 됩니다. 

 

콜롬버스 말고도 지구를 횡단하기 위한 모험가들의 시도는 계속 되었는데요, 1497년 5월 2일 베니스의 상인 캐벗은 40M 길이의 매튜호를 타고 브리스톨 항을 떠나 52일 만에 뉴펀들랜드에 도착하게 됩니다. 

 

 

 

 

 

북미에 진출한 프랑스와 영국

16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스페인과 포루투갈이 중남미 식민지를 세우면서 수많은 황금을 본국으로 나르는 중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프랑스 또한 황금을 찾기 위해 1534년 카르티에를 출발시킵니다. 20일 간 항해 끝에 뉴펀들랜드를 지나 세인트 로렌스에 도착합니다. 캐나다라는 말은 원주민들의 언어인 이로쿼이어로 마을이라는 뜻의 가나타(Kanata)에서 유래합니다. 

 

이후 프랑스인들은 1604년 지도 제작가 샹플랭 선장과 몽트가 이끄는 탐사대를 파견했고 펀디 만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프랑스인들은 믹맥 부족과 친하게 지내면서 성공적으로 정착하게 됩니다. 현재 퀘백시에 해당하는 스타다코나에 정착한 프랑스인은 1650년 70명 주민으로 성장했고, 북미대륙의 뉴프랑스의 초석을 세우게 됩니다. 프랑스인들은 이곳을 아카디아라고 부르게 됩니다.

 

반면 영국은 아카디아의 남쪽에 뉴잉글랜드라는 식민지를 세우게 됩니다. 프랑스에서는 이미 현재 노바 스코샤,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뉴브런즈윅까지 프랑스 식민지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 간 갈등이 시작됩니다. 

 

1621년 영국 왕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 출생 알렉산더 경에게 아카디아를 하사하고 그는 새로운 스코틀랜드라는 의미로 노바 스코샤라고 명명합니다. 

 

프랑스인이 처음 정착한 아카디아는 북미 대륙으로 진입하는 교두보로 굉장히 중요한 입지에 있었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는 100년 동안이나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결국 영국에 패해 아카디아를 빼앗긴 프랑스는 케이프 브래턴 섬에 군항을 세우고 루이스버그라고 부르게 됩니다. 

 

 

 

 

반면 영국은 아카디아를 수호하기 위해 노바 스코샤 할리팩스에 군사시설과 해군기지를 건설합니다. 해군 수송선을 동원해 2500명이 넘는 사람들을 할리팩스로 이주시킵니다. 아카디아에서 쫓겨난 프랑스인들은 이로쿼이 족이 살고 있던 스타다코나에 정착하게 되는데요, 이곳이 바로 뉴프랑스의 수도이자 현재 퀘백시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점차 프랑스 본국에서 사람들이 이주해오기 시작하고, 농장들이 들어서면서 사람이 살만한 지역으로 성장합니다. 

 

뉴프랑스는 1663년에야 총독으로 군인출신 프롱트나크 백작과 라발 주교, 타롱 집정관을 보내면서 1675년에는 뉴프랑스 인구가 8000명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1700년에 들어서는 퀘백시에 뉴프랑스 식민지 총독관저와 유명 정치, 종교지도자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퀘백시 인구가 2000명을 넘게 됩니다. 

 

북미에 진출하는 유럽국가들

1600년대에는 이미 많은 유럽국가들이 북미대륙을 차지하던 시대였습니다. 스페인, 포루투갈은 금은보석이 풍부한 멕시코, 중남미 지역을 차지했고 프랑스는 세인트로렌스, 아카디아, 카리브 해를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영국은 1607년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을 시작으로 북미대륙의 식민지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1620년 영국은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매사추세츠의 플리머스에 상륙하고 두번째 식민지를 건설하게 됩니다. 이후에는 150여년에 걸쳐 남쪽 조지아, 메릴랜드, 버지니아, 사우스 캐롤라이나, 노스 캐롤라이나부터 뉴햄프셔, 로드 아일랜드, 코네티컷, 뉴욕, 펜실베니아, 뉴저지, 델라웨어 매사추세츠까지 대서양 연안의 영국 식민지들을 우후죽순 만들기 시작합니다. 

 

남부 식민지역에는 쌀, 담배, 콩 농사가 잘 되었는데요, 영국은 본격적으로 목화재배를 하기 위해 1619년 흑인 노예들을 북미 대률으로 데려오게 됩니다. 남부에 거주하기 시작한 흑인 노예들은 북미대륙의 역사를 바꾸어 놓는 중요한 키맨이 됩니다. 영국의 목화 사랑은 미국의 남북전쟁에서도 남군을 밀어주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프랑스 영국 전쟁

비슷한 시기에 북미대륙에 식민지를 세우기 시작한 프랑스와 영국은 전 세계에서 식민지 쟁탈 전쟁을 벌이는데요, 북미에서는 모피 교역권을 두고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영국 회사 허드슨 베이 컴퍼니가 프랑스의 모피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하면서 영국은 아카디아를, 프랑스는 뉴잉글랜드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1713년 프랑스는 영국에 패하고 워트레흐트 조약을 체결합니다. 아카디아, 뉴펀들랜드, 허드슨 만 일대를 영국에 고스란히 넘겨주게 됩니다. 전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데요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경계선이 명확하지 않아 갈등이 잦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합중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프랑스 병사를 사살하고 21명을 포로 잡아가는 사건으로 세계 도처에서 7년 간 전쟁을 또 하게 됩니다. 

 

1756년부터 1764년 까지 영국과 프랑스는 7년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이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는 뉴프랑스를 영국에게 빼앗기고 맙니다. 이윽고 1759년 영국군은 퀘백 해안 암벽을 기어올라와서 뉴프랑스의 최대 도시 퀘백이 함락됩니다. 1760년 9월에는 몬트리올 마저 영국에 함락됩니다. 북미 대륙에서의 영국과 프랑스간 전쟁은 프랑스의 대패로 끝나게 됩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1760년대 북미대륙에 15개의 식민지를 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노바 스코샤와 플로리다를 제외하고는 거의 100년 동안 독자적으로 운영되어 왔습니다. 문제의 시발점은 영국 정부가 7년 전쟁에 대한 비용을 식민지가 분담해야 한다고 청구서를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국 의회는 식민지와 연관된 법령으로 세금을 징수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식민지자치의회를 무시하는 행위였습니다. 

 

영국은 설탕, 모든 공문서, 신문, 카드 놀이에도 세금을 매기기 시작하면서 급기야 1773년에는 영국인들이 즐겨마시는 홍차에 세금을 매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773년 여름 보스턴 항에 정박중이던 인디언 복장 사람들이 342개의 차 궤짝을 바다에 버립니다. 미국 식민지들은 1774년 제1차 대륙협의회를 열고 영국정부에게 무리한 식민지 정책을 철회할 것을 요구합니다. 

 

결국 참다 못한 식민지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1775년 4월 19일 독립전쟁이 발발합니다. 영국군은 무기를 은닉하고 있는 민병대를 수색하고 있었는데요, 콩고드로 가던 길에 식민지 민병대를 발견하고 해산하라 명령하지만 이 때 한 방의 총성이 울리게 됩니다.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세계로 울려퍼진 총성입니다. 이 일로 조지 워싱턴을 중심으로 13개 식민지들은 대륙군을 창설합니다. 

 

지속되는 요청에도 무시로 일관하는 영국정부의 태도를 보고 1776년 3월 남캐롤라이나 의회가 공화정부를 선언하면서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서(Declaration of Independence)가 서명되고 공포됩니다. 8년간 이어진 미국의 독립전쟁에 프랑스가 미국편을 들면서 1783년 9월 파리조약으로 미국은 독립적인 나라가 됩니다. 

 

 

미국과 다른 길을 걸은 캐나다

미국은 캐나다 지역에 있는 영국 식민지들 퀘백, 노바 스코샤,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뉴펀들랜드에게 설득하지만 영국의 식민지로 남게 됩니다. 1775년 11월 미국은 북으로 진격하면서 몬트리올에 있는 식민지 정부를 퀘백으로 쫓아 냅니다. 이제 프랑스와 영국간의 대결 구도가 미국과 영국 대결구도로 바뀌게 됩니다. 

 

영국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한 미국이지만 모든 미국인이 영국을 반대한 건 아닙니다. 일단 영국에 대항하는 행위 자체가 영국 왕실에 대한 불경스럽다고 생각했고, 이제 영국 해군의 보호도 못받고 영국으로 부터 질 좋은 상품을 가져오지도 못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미국이 아닌 노바스 코샤, 퀘백으로 올라가거나 영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캐나다 지역으로 넘어온 영국파 사람들은 할리팩스에 지배를 받는 걸 거부하고 자치 정부를 원했는데요, 당시 영국 국왕 조지 3세가 독일 브런즈윅 가 혈통이었기 때문에 뉴브런즈윅이라고 정하고 새로운 식민지를 세우게 됩니다. 

 

원주민들 말로 '만남의 장소'라는 뜻을 가진 토론토 지역에는 영국인들이 자리잡으면서 상업 중심지로 급성장하게 됩니다. 온타리오 호 지역으로 이주해온 영국파 사람들은 프랑스계와 구별되는 자치 정부를 원했고 1791년 세인트 로렌스 강 하류 지역을 로어 캐나다로 상류 지역은 어퍼 캐나다로 명명합니다. 이 후 로어 캐나다는 캐나다 이스트에서 퀘백 주가 되고, 어퍼 캐나다는 캐나다 웨스트를 거쳐 온타라오 주가 됩니다. 

 

1840년이 되어서야 영국 의회는 연합법을 통과시키고 1841년 입법회의를 합치게 되면서 로어 캐나다는 캐나다 이스트, 어퍼 캐나다는 캐나다 웨스트가 됩니다. 보고서를 작성했던 더럼 공은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생활방식을 포기할 것으로 기대하고 결합안을 제시했지만 이는 캐나다에 연방을 탄생시키는 초석되 입니다. 

 

 

캐나다 인구 급증 시기

캐나다로 대거 인구가 들어오기 시작한 시점은 1800년대 초 나폴레옹간의 전쟁이 끝나고 난 직후였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이민을 오기 시작했고, 1850년대에 들어서는 로어캐나다와 어퍼 캐나다의 인구가 200만명에 육박하기 시작합니다. 

 

 

 

 

한편 아일랜드 출신 사람들이 대거 이주하기 시작하는데요, 1845년 아일랜드 전역에 감자가 썩어버리는 이른바 감자기근이 찾아오면서 아사하는 사람들이 늘자 영국을 떠나 북미대륙으로 이주하는 사람이 급증하기 시작합니다. 

 

캐나다 서부쪽으로는 1842년 뉴칼레도니아 지역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1849년 캘리포니아 골드러쉬에 참여했던 사람이 대거 캐나다로 유입됩니다. 영국은 밴쿠버 섬 건너에 새로운 식민지를 만들고 브리티시 컬럼비아 라는 이름을 붙이게 됩니다. 

 

캐나다 연방 탄생

19세기 중반만 하더라도 캐나다는 7개의 영국 식민지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식민지들은 자체 입법회의를 가졌지만 영국 의회가 제정한 법과 영국 여왕을 대표한 총독이 파견되면서 식민지 방위도 대영제국의 해군과 육군이 포진해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1861년~1865년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벌어집니다. 

 

영국은 남부지역에서 생산되는 목화 때문에 남군을 지원했지만 결과는 북군의 승리로 끝났고, 미국이 캐나다를 다시 침공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1864년 캐나다 연립정부가 수립되고 캐나다 웨스트에서는 맥도널드가, 캐나다 이스트에서는 카르티에에 의한 2인 지도체제가 마련됩니다. 

 

캐나다에 있는 영국 식민지들은 연방안을 마련해 런던 협의회에서 연방결의안(영령북미법령~캐나다법령)을 통과시키고 1867년 7월 1일 캐나다 자치령 제정 기념일이 됩니다. 처음 생겨난 캐나다는 온타리오, 퀘백, 노바 스코샤, 뉴브런즈윅 4곳으로 시작합니다. 

 

캐나다의 수도는 아시다시피 온타리오주의 오타와인데요, 당시 온타리오와 퀘백간 수도 유치 경쟁이 매우 심했고, 영국 여왕인 빅토리아 여왕은 그냥 캐나다 수도는 오타와야 라고 이미 정해놨기 때문에 뜬금없이 오타와가 캐나다의 수도로 지정됩니다. 

 

 

 

 

✅ 온타리오와 퀘백 중간에 위치

✅ 내륙지역에 위치해서 미국의 공격으로 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함

✅ 불어와 영어가 공용으로 사용되는 곳

 

이 후 매니토바, 브리티시 칼럼비아(콜럼버스 이름 땀),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래드(빅토리아 여왕 아버지 에드워드 왕자 이름 땀)가 추가되면서 현재 10개주와 3개의 준주로 구성된 캐나다가 완성됩니다. 

 

 

캐나다 왕과 영국 왕은 같습니다

1867년 만들어진 캐나다는 1931년 까지 연합왕국으로 통치되어 왔지만 1931년 웨스트민스터 헌정이 만들어지면서 공식적으로는 영국으로 부터 완전히 독립된 국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왕국 왕을 국가원수로 인정하고 실질적인 행정은 총리가 운영하는 입헌군주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영국이 웨스트민스터 헌정을 만들게 된 이유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대영 제국 지위가 심각하게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식민지국가들의 독립에 대한 힘이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1931년 웨스트민스터 헌장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영국 자치령들은 내정, 외교에서 완전한 주권을 가지게 된다

✅ 영국 자치령은 영국 의회에서 제정된 법률을 따르지 않는다

✅ 영국 자치령은 영국 왕을 군주로 인정할지 여부를 결정할 권한을 가질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헌장 이 후 영국연방이 탄생하게 되었고, 현재 15개국이 영연방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현재 캐나다 왕은 찰스 3세 입니다. 아직 까지도 캐나다가 영국 식민지 시절의 영향을 받고 있고, 캐나다는 연간 $6백만의 지불금을 영국에 지불하고 있습니다. 

찰스 3세
캐나다왕 + 영국왕

 

최근 대관식을 가진 찰스 3세는 2023년 5월 6일 1억 파운드를 플렉스 하면서 성대하게 치뤘습니다. 대관식에는 영국인들의 세금도 들어가지만 영연방에서 나오는 지불금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캐나다에서 일하면서 영국 국왕의 대관식에 돈을 대고 있는 셈입니다. 

 

 

찰스3세 대관식 비용, 70년전보다 덜 든다지만 ‘1억파운드’…일각선 “세금낭비”

다음달 6일 열리는 영국 찰스 3세 국왕 대관식은 1000년 영국 왕실 전통은 유지하되 70년 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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